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도르 지프코프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1911년 [[소피아(도시)|소피아]] 근교의 한 마을인 프라베츠(Правец, Pravets)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가난한 가정 사정으로 인해 대학교도 진학하지 못한 채 고등학교 졸업 학력[* 하지만 당시 불가리아에서 [[고졸]]은 결코 저학력이 아니었다. 1925년 불가리아 문해율이 60.3%, 1935년 문해율이 68.6%였다. 고등학교 졸업만 해도 지식청년 취급받던 [[8.15 광복]] 직후의 한국을 생각하면 된다.]으로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1928년 [[공산주의]] 청년 동맹에 가입해 공산주의자가 되었다. [[제2차 세계 대전]] 중에는 [[나치 독일]]에 대항하는 친 [[소련]] [[레지스탕스]] 활동에 가담하였으며 그 공로로 종전 직후 [[이오시프 스탈린]]의 지원을 받은 [[게오르기 디미트로프]](Георги Димитров)에 의해 불가리아가 공산화되자 공산당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어 [[집단농장|농업 집단화]]를 이끌었다.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지자 강경한 [[스탈린주의]]자였던 [[벌코 체르벤코프]](Вълко Червенков)가 소련의 압력으로 공산당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자신은 수상에만 남았으며 온건주의자였던 그가 1954년 3월 4일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올랐다. [[니키타 흐루쇼프]]를 적극 지지하며 불가리아 내에서 탈 스탈린 움직임을 주도하던 그는 권력을 서서히 강화하면서 1956년에 수상직을 차지하고 여전히 권세를 휘두르던 체르벤코프를 개인숭배자로 비판하여 실각시키는 데 성공해 마침내 집권했다. 1962년에 이르면 1인 지배 체제를 사실상 굳혔다. 1인 지배 체제를 확립하고 나서 1964년 흐루쇼프의 축출 후에도 [[레오니트 브레즈네프]]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[[체코슬로바키아]]에서 [[프라하의 봄]]이 일어나자 [[바르샤바 조약 기구]] 회원국으로서 진압군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[[친소]] 노선을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. 1965년 촐로 크리스티프[* 전직 주북한 불가리아대사]를 위시한 불가리아의 몇몇 정치인들이 온건파 지프코프를 몰아내고 민족주의, 스탈린주의 정권을 설립하고자 했으나[* 참고로 이들이 롤모델로 삼은 대상이 무려 '''[[김일성]]'''이었다고 하는데 만약 쿠데타가 성공했으면 불가리아는 [[엔베르 호자]]의 [[알바니아]]도 따위로 만드는 생지옥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.] 발각되기도 했다.[* 사족으로 이들을 체포하기 위한 작전의 암호명은 '바보'였다고 한다. [[주체사상]]과 유일사상체계를 수립하기 전에도 [[북한]]은 공산권 국가들에게도 추종하는 것조차 바보로 여겨졌을 정도로 한심한 취급을 받았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다.] 경제 면에서 농업 집중 육성과 산업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시장 경제 요소를 어느 정도 도입하여 [[코카 콜라]]의 불가리아 진출도 허용하는 등 개방적인 면모를 취했지만 동시에 불가리아 인구의 약 1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던 [[튀르키예인]]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가하고 민족의 다수를 차지하는 불가리아인들을 우대하는 불가리아 민족 중심의 민족주의적 정책을 펼쳤고 정치 민주화를 억압하는 등 독재자로서의 면모도 드러내기도 했었다. 이 때의 탄압으로 불가리아를 떠난 터키인 중에는 [[1988년 서울 올림픽]]에서 금메달을 딴 역도 선수 나임 쉴레이마노을루(Naim Süleymanoğlu, 불가리아식으로는 Наим Сюлейманов)가 있었는데 1986년 [[터키]]로 망명하여 불가리아식 성인 술레이마노프를 터키식인 쉴레이마노을루로 바꿨다. 실제로 구 [[공산권]] 국가들의 공산주의 독재자들 중 의외로 [[민족주의]]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. [[베트남]]의 국부인 [[호찌민]]은 말 할 것도 없고 불가리아와 인접한 [[유고슬라비아]]의 [[요시프 브로즈 티토]]도 공산권의 맹주였던 소련의 간섭을 거부하고 [[제3세계]]의 지도국을 자처하면서 독자적인 사회주의, 민족주의 체제를 구축하며 [[유고슬라비아]]를 통치했고 [[북한]]의 [[김일성]]이 정치적 지지를 위해 [[주체사상]]이라는 명분 하에 민족주의를 이용한 전례도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